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최근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에 대해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이후 다시 '현행복의 인문학이야기'를 주제로 새로운 연재를 계속한다. 한시로 읽는 제주 역사는 고려-조선시대 한시 중 그동안 발표되지 않은 제주관련 한시들을 모아 해석한 내용이다. 특히 각주내용을 따로 수록, 한시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된다(편집자주)
“한시(漢詩)로 읽는 제주 역사”<7>
엮어 옮김[編譯] ‧ 마명(馬鳴) 현 행 복(玄行福)
7. 충암(冲庵) 김정(金淨)의 ‘제주 유배시’ 3수(1521)
가. <제로방송(題路傍松) 3수(三首)>
【원문(原文)】
【판독(判讀)】
題路傍松三首
枝條摧落葉鬖髿 斤斧餘身欲臥沙 望断
棟樑人世用 査牙堪作海仙槎
海風吹去悲聲遠 山月高來瘦影疎 賴有
直根泉下到 雪霜標格未全除
欲庇炎程暍死民 遠辭巖壑屈長身 斤斧日尋商火煮 知公如政亦
無人
【해석(解釋)】
가. <길옆 소나무 아래에서 3수의 시를 짓다[題路傍松三首]>
(1)
枝條摧落葉鬖髿(지조최락엽삼사) 가지는 꺾인 채, 솔잎은 여인의 흐트러진 머리
斤斧餘身欲臥沙(근부여신욕와사) 도끼로 남은 몸통 찍어 모래 위에 눕히려 하네.
望断棟樑人世用(망단동량인세용) 동량재(棟樑材) 될 꿈 잘려 사람들에게 쓰일 바엔
査牙堪作海仙槎(사아감작해선사) 들쭉날쭉한 그대로 바다 신선의 뗏목이나 되리.
※ 운자 : 평성(平聲) ‘마(麻)’운 : 髿, 沙, 槎
(2)
海風吹去悲聲遠(해풍취거비성원) 바닷바람 불 때마다 저 멀리서 슬픈 소리
山月高來瘦影疎(산월고래수영소) 산달 높게 솟아올라 솔 여윈 그림자 성기었네.
賴有直根泉下到(뇌유직근천하도) 다행히도 곧은 뿌리 땅 밑까지 뻗쳐있어
雪霜標格未全除(설상표격미전제) 눈 서리 겪은 풍상, 그래도 여전히 남았구나.
※ 운자 : 평성(平聲) ‘魚(어)’운 - 疎, 除
(3)
欲庇炎程暍死民(욕비염정갈사민) 더위에 지친 나그네들 시원한 그늘로 감싸고자
遠辭巖壑屈長身(원사암학굴장신) 먼 심산유곡 마다하고 긴 몸 휘어진 채 있구나.
斤斧日尋商火煮(근부일심상화자) 매일 도끼질하더니만 행상 밥 짓는 땔감용이라니,
知公如政亦無人(지공여정역무인) 정승 같은 그대의 공, 아는 이 과연 몇이나 될까.
※ 운자 : 평성(平聲) ‘眞(진)’운 - 民, 身, 人
【해설(解說)】
충암 선생이 제주로 유배를 떠나기에 앞서 잠시 해남의 바닷가에 머물며 지은 <길옆 소나무 아래에서 3수의 시를 짓다[題路傍松三首]>는 시이다.
이 시와 관련해 예전 조선일보의 유명 칼럼니스트였던 이규태(李圭泰) 선생이 쓴 칼럼 가운데, ‘김정(金淨) 유배지(流配址)’란 글이 있다.
“옛 선비들은 참 멋이 있었다. 유람할 때나 출타할 때 선비들은 풍류낫으로 불리는 낫 하나를 배낭에 꽂고 떠난다. 어느 풍취(風趣) 앞에 시흥(詩興)이 솟으면 이 풍류낫으로 소나무 밑둥을 편편하게 깎아 시판을 만든다.
필묵을 꺼내어 그곳에 시 한 수 써놓고 지나간다. 마치 나뭇잎에 이슬이 맺히듯어느 시공에 방황하는 미를 이슬처럼 응집시켜 살아 있는 나무에 결속시켜 떠나간다. 이런 풍류가 세상 어느 다른 나라에 있었던가 싶다.
중종 15년인 1520년 윤달이 든 가을, 소장과격파 정치가로 일세를 떨쳤던 충암(冲庵) 김정(金淨) 판서는 제주도로 가는 유배길에 해남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 그는 바닷가의 노송 아래에서 쉴 때 풍류낫으로 시판을 깎았다.
(…) 이 해남(海南) 해송(海松)의 시는 그 후의 사림사회에 애송되어 기개있는 선비를 적잖이 울렸고, 또 ‘해선의 뗏목[海仙槎]’이라는 과거시험의 시운(詩韻)으로도 자주 출제되었던 것이다.
제주에 유배 온 김정은 가락천(嘉樂川) 냇가에서 살다 이듬해에 사약을 받고 숨졌다. 그 가락천 가에는 그가 먹고 살았던 샘물이 판서정(判書井)이란 이름으로 극히 근래까지 전해 내려왔으나 20년 전후에 그 행적이 없어졌다고 한다. (…) ”
풍류낫을 든 충암 김정의 모습을 그린 사연도 사연이지만, 이 시는 그 시상의 전개가 독특하면서도 감정이입(感情移入)의 예지가 번뜩이는 듯하다.
해남의 바닷가 외진 곳에 홀로 서 있는 소나무의 신세는 어쩌면 유배차 먼 길을 떠나는 자신의 처지와 너무나 닮아있음을 솔직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동량재(棟樑材) 되려고 하던 꿈 중도에 좌절된 바엔 들쭉날쭉 생긴 그대로 바다 신선의 뗏목 배나 되겠다.”는 이 표현이야말로 작자의 심경을 유감없이 내보인 수작(秀作)의 기법이라 할 것이다.
더구나 이 시편의 맨 마지막 구절인 ‘지공여정(知公如政)’은 해석하기에 따라 달리 나타나기도 한다.
이 부분의 해석을 두고 대개는 ‘정승(政丞) 같은 그대의 공을 아는 이’로 해석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를 달리 생각해 보면 ‘진시황과 같이 그대의 공을 아는 이’로 번역되기도 한다.
곧 진시황의 본명이 성(姓)은 ‘영(嬴)’이요, 이름이 ‘정(政)’으로 불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시황의 이름자인 ‘政(정)’자를 내세워 자신의 이름자인 ‘淨(정)’자를 중의법(重意法)과 같은 효과를 내보이려고 충암 자신이 일부러 그렇게 표현했던 건 아닐까? 우연한 일로 보기에는 너무나 절묘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시황제본기(始皇帝本紀) · 봉선서(封禪書)>에 보면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진시황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태산에 올랐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게 되자 인근 소나무 아래로 급히 몸을 피했는데, 비가 그치자 진시황은 그 소나무를 두고서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특별히 ‘오대부(五大夫)’란 벼슬을 내렸다.
현재도 중국 태산에 가보면 이런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 고목의 소나무가 실재한다고 한다.
참고로 조선조 세조 때 속리산의 ‘정이품송’의 고사도 이와 비슷한 사례이다.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세조 임금이 어느 날 법주사로 행차하다가 가마를 가로막던 소나무 가지가 절로 올라가면서 통행이 가능해지자 임금이 특별히 그 소나무에게 정이품이란 벼슬을 하사했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연재 다음에 계속 됩니다)
필자소개
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
‧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태생
- 어린 시절부터 한학(漢學)과 서예(書藝) 독학(獨學)
외조부에게서 《천자문(千字文)》 ‧ 《명심보감(明心寶鑑)》 등 기초 한문 학습
주요 논문 및 저서
(1) 논문 : <공자(孔子)의 음악사상>, <일본에 건너간 탐라의 음악 - 도라악(度羅樂) 연구>, <한국오페라 ‘춘향전(春香傳)’에 관한 연구>, <동굴의 자연음향과 음악적 활용 가치>, <15세기 제주 유배인 홍유손(洪裕孫) 연구>, <제주 오현(五賢)의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 등
(2) 단행본 저술 : 《엔리코 카루소》(1996), 《악(樂) ‧ 관(觀) ‧ 심(深)》(2003), 《방선문(訪仙門)》(2004), 《취병담(翠屛潭)》(2006), 《탐라직방설(耽羅職方說)》(2008), 《우도가(牛島歌)》(2010), 《영해창수록(嶺海唱酬錄)》(2011), 《귤록(橘錄)》(2016), 《청용만고(聽舂漫稿)》(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