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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불사이군..곽지리 김해김씨입도조(김만희)신도비

기사승인 2017.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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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의 대기근 해결한 의녀 김만덕은 김만희의 15대손


곽지리 김해김씨입도조(김만희)신도비


위치 : 북제주군 애월읍 곽지리 846
유형 ; 비석(선현유허)
가는 길: 애월읍 곽지리 곽지 해수욕장 입구 4거리에서 한라산쪽으로 1KM쯤 올라가면 왼쪽에 김해김씨 좌정승공파 입도조 묘역이 있음

   
▲ 곽지리_김례묘
   
▲ 곽지리_김만희신도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할 무렵 <하늘에 두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 백성에게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天無二日, 民無二王)는 성리학의 원칙을 지키기 위하여 정몽주 같은 분은 죽기도 하였다.

‘신하가 두 임금을 섬기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성리학 정신을 지키다가 한천, 이미, 김만희 등 세분이 제주에 유배왔다.

이 세 사람을 두고 고려 말에 끝내 지조를 지켰다고 하여 제주 삼절신(三節臣)이라고 부르고 있다.

고려 공양왕 밑에서 오늘날의 수상급인 도첨의 좌정승을 지낸 김만희(金萬希, 호 척재惕齋)는 고서산에 들어가 숨어버렸다.

개국 후 태조는 옛 유신들을 조정에 나오도록 명을 내렸지만 충신은 불사이군이라 하여 여전히 고서산에 머물렀다.

그 결과 그에게 제주 유배형이 내려졌으며 고령인 점을 감안하여 가족이 따라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김만희는 손자 김예, 증손자 김봉과 함께 애월 포구에 닻을 내리니 이때가 1393년(태조 2년)10월로 그의 나이 81세의 고령이었다. 애월 포구에서 가까운 곽지에 적거를 정한 그는 11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그는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여 이름을 바꾸었는데 그 죄가 만만하여 밝은 사리를 거울삼아 하늘에 바랄 뿐(不臣改名 萬萬有罪 希天監昭昭也)이라는 뜻에서 만희로 고쳤다.(증보 제주통사 P85, 양진건 저, 그 섬에 유배된 사람들에서)

그의 나이 91세에 유배가 풀려 고향인 황해도로 돌아가면서 손자 예(禮)를 남기고 갔다. 김예는 곽지에서 밀양박씨 부인과 혼인하여 제주에 머물렀다.

1792년 정조 18년 제주의 대기근을 해결한 의녀 김만덕은 김만희의 15대손이며 김구오는 추사 김정희가 유배왔을 때 추사체를 전수받은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이며 그도 김만희의 후손이다.

3.1운동 때 태극기에 혈서로 대한 독립만세를 쓰고 앞장섰던 김필원도 김만희의 후손이다.

김만희는 김해김씨(金海金氏) 좌정승공파(左政承公派)의 제주입도조이다.

종친회에서는 입도조 묘가 북녘에 있어 참배하지 못함을 안타까이 여긴 나머지 1981년 12월에 入島 3세 김예(金禮; 실질적인 입도조)와 부인 밀양박씨(密陽朴氏)의 묘소가 있는 곽지악 기슭에 고려삼중대광첨의좌정승김해김공만희신도비(高麗三重大匡僉議左政丞金海金公萬希神道碑)와 2세 혁(赫)의 단향비(壇享碑)를 세워 성역화하고 있다.

위 사진은 김례의 묘, 아래 사진은 김만희신도비이다.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http://www.jejuhistory.co.kr/index.php

<저작권자 © 제주환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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