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탐라 만리장성..삼양3동 환해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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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탐라 만리장성..삼양3동 환해장성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2.26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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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장성은 바닷가를 따라 둘러쌓았는데 둘레가 300여 리'

 

삼양3동 환해장성

위치 ; 제주시 삼양3동 거문여 조선소 서남쪽에서부터 버렁성창에 이르는 바닷가에 환해장성이 남아 있다.
시대 ; 고려~조선
유형 ; 방어유적(성)

 

 

 

제주도에서 외적을 막기 위하여 바닷가를 돌아가며 쌓은 성을 환해장성이라 한다. 제주의 방어시설 중 환해장성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에 처음 나타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옛 장성은 바닷가를 따라 둘러쌓았는데 둘레가 300여 리이다. 고려 원종 때에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켜 진도에 웅거하니 왕이 시랑 고여림에게 군사 1,000명을 주어 탐라를 수비하도록 하자 제주에 들어온 고여림과 군사들은 삼별초 군사들을 대비하기 위한 장성(長城)을 쌓았다.


삼별초가 진도에 머무르고 있던 고려 원종11년(1270) 9월 고려 정부는 삼별초의 제주 진입을 막기 위해 영암부사 김수, 시랑 고여림 장군에게 군사 1,000명 정도를 주어 제주에 보냈다. 그들은 삼별초의 제주도 침입에 대비해 제주도민을 동원해 해안에 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 성이 환해장성의 시작이다. 그러나 두 달 뒤에 이문경이 지휘하는 삼별초의 별동부대가 들어와 관군을 전멸시키고 제주를 점령하였다.


다음 해 5월 제주에 들어온 삼별초 역시 고려 정부군과 몽골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성을 쌓았다. 300리는 약 120~150㎞이다. 제주도 둘레가 253㎞이므로 포구, 백사장, 절벽 등을 뺀 섬 둘레의 절반 정도에 성을 쌓은 것이다.


바닷가 성 쌓기는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왜구왜구(倭寇)란 일본의 해적집단을 말한다. 고려 말엽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왜구는 남해안은 물론 연안항로를 따라 서해안과 중국에까지 침범했다. 고려말부터 18세기까지 50회 이상 제주에 침범했다.


의 침입을 막기 위해 바닷가를 따라가며 성을 쌓고 보수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런데 삼별초 시기를 지나면 환해장성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인데 그 효과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왜구가 제주도에 들어오는 목적은 재물을 약탈하기 위함이므로 재물을 약탈하려면 당연히 재물이 있는 곳 즉 마을이 있는 포구로 들어와야 한다. 포구가 아닌 곳으로는 배를 붙이기가 거의 불가능하고 약탈한 물건을 이동하는 데 시간도 많이 걸려 그들로서는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김상헌은 남사록에서

왜적이 들어와 도적질하였음에도 이 섬에서 한 번도 뜻을 얻지 못했던 것은 섬을 돌아가며 석벽이 바다 속에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하늘이 만든 험지여서 왜적들의 배가 정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라고 하여 제주도의 해안에 배를 붙이기가 어렵다는 것을 기록하였고 실제로도 왜구들은 별도포, 천미포 등 포구시설이 있는 곳으로 침입했었다. 왜구가 들어오지도 않을 곳에 성을 쌓으면서 백성을 고생시킨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또 김상헌은 『南槎錄(남사록)』에서 환해장성에 대하여


바닷가 일대에는 돌로 성을 쌓았는데 잇따라 이어지며 끊어지지 아니한다. 섬을 돌아가며 다 그러하다. 이것은 탐라 때 쌓은 만리장성이라 한다.
라고 하여 탐라의 만리장성이라 기록하였다. 탐라시대부터 쌓은 것이라고 잘못 알기는 하였지만 환해장성이 오래되었음을 기록한 것이다. 『고지도첩(古地圖帖)』 중 「탐라전도」에는 애월개의 동쪽에 옛 장성이 보이고 있다.


1845년 권즉 목사 때에 마지막 보수작업이 있었다. 조선 헌종11년(1845) 6월에 영국 선박 이 배는 사마랑호였다. 조선왕조실록 헌종11년(1845) 6월29일 기록에 나온다. 〈이양선(異樣船)이 호남(湖南) 흥양(興陽)과 제주(濟州)의 바다 가운데에 출몰 왕래하며 스스로 대영국(大英國)의 배라 하면서 이르는 섬마다 곧 희고 작은 기를 세우고 물을 재는 줄로 바다의 깊이를 재며 돌을 쌓고 회를 칠하여 그 방위(方位)를 표하고 세 그루의 나무를 묶어 그 위에 경판(鏡板)을 놓고 벌여 서서 절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역학 통사(譯學通事)가 달려가서 사정을 물으니, 녹명지(錄名紙)라는 것과 여러 나라의 지도(地圖)와 종려선(棕櫚扇) 두 자루를 던지고는 드디어 돛을 펴고 동북으로 갔다.〉


1척이 우도 앞바다에 1개월이나 정박하여 삼읍의 연안을 측량하고 돌을 모아 회를 칠하여 방위를 표시하므로 목사 권즉이 군사를 동원하여 변에 대비하였다. 이 때 대정현 사계리 사람 유명록이
"저 양이와 힘으로써 정면으로 싸우기는 어렵지만 싸우지 않고 파괴할 수는 있습니다. 소인에게 화약을 주시면 배에 몰래 싣고 접근하여 화약에 불을 놓아 양이와 함께 죽겠습니다."


하니 권직 목사가 그 충의심에 감탄하여 우대하고 화약을 준비하고 날을 정하여 시행하려던 중 영국 배는 홀연히 돛을 달아 동북쪽으로 떠나가 버렸다. 권즉 목사는 그 해 겨울 도민을 총동원하여 환해장성을 크게 수축하였다 한다. 오늘날 해안에 남아 있는 자취는 바로 이 때의 것이다.


이와 같이 바닷가에 성(환해장성) 쌓기는 고려 때 삼별초와 관련하여 축성이 시작되었고 조선시대에도 계속하여 보수되었다. 무너지면 쌓고, 또다시 무너지면 쌓아올리는 일이 대를 이었다. 장장 600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환해장성은 군사적인 목적 외에도 해풍으로 인한 농작물의 염분 피해를 줄이는 역할도 했다.
바다에서 뭍으로 향하는 도중에 20~30m 이내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 환해장성이다. 바닷가는 암반지대이고 비탈이 심한 지형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해안에 성을 쌓으면 성안이 자연스럽게 성밖보다 높아져서 방어에 유리하게 되었다. 성의 높이는 2~4m에 이른다.


환해장성은 대부분 제주 바닷가에 흔한 현무암으로 허튼층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현지의 돌을 사용했기 때문에 바닷가에서 파도에 닳아 둥글둥글한 돌을 이용한 곳이 많다. 남아 있는 성의 구조를 보면 성의 아래쪽 너비는 보통 1.5m 정도 되는데 양쪽에는 비교적 큰 돌을 쌓으면서 그 속에 비교적 작은 잡석을 채워가는 겹담 형식으로 쌓았다. 완전히 수직으로 쌓지는 않고 위로 갈수록 조금씩 좁아져 위 너비는 1m 정도가 된다. 폭은 1~1.5m가 대부분인데 애월리에 남아 있는 환해장성은 폭이 5m 정도 되는 곳도 있다.


성의 안쪽에는 군인이 순찰하는 길을 만들었는데 이를 회곽도라 한다. 회곽도의 폭은 1m 정도, 높이는 1~1.2m 정도이며, 회곽도에 서면 성 바깥쪽을 바라볼 수 있다.

삼양3동의 환해장성은 동쪽으로는 검은여 포구 옆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버렁포구 옆까지 이어져 있다. 높이나 형태가 온전하지는 않지만 회곽도가 남아 있는 부분도 있고 전체적으로 환해장성임을 확인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작성 041021, 보완 120625, 15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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