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부역 가볍게..도남동 구재룡목사선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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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부역 가볍게..도남동 구재룡목사선정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1.20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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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세곽,일용곽 없애고 정사 번거롭지 않아..백성들이 추모'

 

도남동 구재룡목사선정비



사상구공재룡애민선정비 使相具公載龍愛民善政碑


위치 ; 제주시 도남동 707-1. 속칭 회사커리. 도남주유소 서쪽 복지타운 공사중인 부지내로 들어가서 시멘트길을 따라 400m 정도 지점.(정부 제주지방합동청사 남쪽 언덕의 소공원 안)

규격 ; 37cm×77cm×12cm(윗부분이 약간 둥글게 다듬어졌음)
건립년대 ; 1841년
비문 ; 앞면에는〈使相具公載龍愛民善政碑〉 뒷면에는〈道老里 道光 二十一年五月 日〉이라고 새겨져 있다.

 

 

기단은 140cm 정도 현무암 잡석을 쌓아올리고 그 위에 받침돌과 함께 시멘트로 마감하였으며 왼쪽에 허명 목사 선정비 오른쪽에 송상순 판관 선정비가 나란히 서 있다.

구재룡 겸방어사는 헌종6년(1839) 3월에 부임하였다.

그는 늠료(녹봉) 錢 500여냥을 마련하여 호적을 작성할 때의 인구미(人口米, 수수료)로 충당하도록 하였고, 가파도 목장의 소를 모동장으로 옮겨 방목하였다.

또 정의현과 대정현의 수세곽(水稅藿)과 제주목의 일용곽(日用藿)을 없애는 등 정사가 번거롭지 않고 부역을 가볍게 하여 백성들이 추모하였다고 한다.(제주시 비석일람 46쪽, 북제주군 비석총람 678쪽, 증보 제주통사 463쪽)

그러나 그는 1841년 3월에 파직되었다.

그 이유는 영국 선박이 가파도에 정박하며 소를 약탈해 갔을 때 대정현감이 그들을 불러 조사하지 않았다고 조정에 보고했는데, 이 때 조정에서는 목사가 평상시에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여 대정현감과 함께 파직한 것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840년 12월 영국 선박 2척이 가파도에 와서 총을 쏘며 소들을 약탈하여갔다.

이 때 전라감사 이목연은 제주목사의 장계를 비변사에 올려 대정현감 강계우를 파직하도록 하였다.

비변사에서 보고하기를 '야만인의 배가 바다에 출몰하는 것은 저들의 교활한 습성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를 막아야 할 병사들이 비록 훈련을 게을리 했다고 책망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섬 주위의 포구와 항만을 굳건히 방어하고 경계하도록 살펴야 함이 본시 당연한 일입니다.

하물며 저들은 40명에 불과하였는데 어쩐 일인지 먼저 겁을 먹고 도망가서 흩어졌으니 변방을 지킬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이들을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제주목사 구재룡도 함께 파직하소서' 하였다.(증보 제주통사 196쪽)


복지타운 건설후 복지타운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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