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칠 건강칼럼) 뇌경색을 이겨 내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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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칠 건강칼럼) 뇌경색을 이겨 내고..(2)
  • 강문칠(직곡가, 음악평론가)
  • 승인 2024.05.10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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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칠(직곡가, 음악평론가)

 

이 글은 직곡가, 음악평론가인 강문칠 전 예총회장 본인이 뇌경색을 앓은 후 수년간 투병한 과정과 완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내용을 총 정리한 글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 가운데 뇌경색을 안고 살아가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게재하게 된 것이다.

 

(이어서 계속)

사진은 특정내용과 관련 없습니다

 

건강을 되찾은 직후의 강문칠 작곡가

 

●매일 오전 오후로 걸었다. 대체로 두 시간 가량 걸리는 이 길을 나는 걸으면서 항상 희망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생각을 했다. 내일 일어날 일들, 미래에 건설할 꿈을 꾸면서 걸었다. 언제나 맑고 밝은 사고를 하는 것이 뇌의 운동을 건강하게 하는 것 같아서 언제나 그와 같은 생각을 했다.

나의 걸음은 건강이 아니고 사느냐 죽느냐의 심각한 문제였다. 천천히 걷는 나의 모습에 후에 안 일이지만 아내가 눈물을 훔쳤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는 나를 태워서 저지에 있는 ‘다스름 한의원’을 일주일이면 2회 정도, 3일에 한번을 침을 맞으러 갔다.

우선 본격적인 진룟를 받기 전에 한의사에게로 가면 한의사는 나의 손목을 잡고 진맥을 한다. 진맥이 끝나면 손등에 3~4군데 침을 놓고는 밖으로 나가서 기다리라고 한다. 밖에는 순서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많다. 여기는 언제나 환자들로 붐을 이룬다.

십여분이 지나면 20여명의 한자들이 차례로 앉아 있다가 의사가 와서 침을 놓는다. 나는 유독 침을 심하게 놓았다. 어떤 때는 머리 전체에 작은 침으로 콕콕 침을 놓는다.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간호사는 피를 닦느라고 애를 쓴다. 손톱과 발톱 그리고 손과 발등에도 침을 놓는다.

어떤 날은 혀에다가 마구잡이로 침을 놓고 피가 흥건하게 젖을 정도로 많이 놓았다. 나는 침을 맞는 동안 아픔을 참아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한의사의 치료 방법에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어떤 날은 긴 침으로 목 뒤에 침을 길게 놓고서 침을 두 손으로 흔들어 댔다.

붉은 피가 침을 맞은 부분에서 검붉은 피가 흘렀다. 그 피가 썩은 피라고들 했다. 나처럼 피가 나는 환자는 없었다. 나에게만 해당 되는 것인지 침을 맞는 날에는 집에 오면 몹시도 피곤하여 잠을 청하고는 했다. 그러나 전적으로 의사를 신뢰를 하면서 다음 침을 맞는 날을 기다렸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침을 계속 맞으러 제주시에서 저지리 까지 수도 없는 날을 다니면서 오늘처럼 건강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덕용 병원에서의 생활도 최선을 다하는 일이었지만 몹시도 보기가 민망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필 일은 아니었다.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인가? 나는 주위의 시선에 전혀 신경을 쓰질 않았다. 덕용병원에서도 약을 주거나 주사를 놓질 않았다. 오직 나의 행동에 의지하고 생각을 바르게 하는 일 만이 치료법인가 보다. 그래도 생각하는 것은 또렷하여 별 문제가 없었던 것 같다.

이 병원으로 오기 전에 그전 병원에서 지어 준 약을 매일 복용 하고 있었다. 2개월 쯤 병원에서 지내다가 집으로 왔다. 오름을 오르는 일정은 매일 같이 수행을 했다. 그런데 집에 와서는 나 스스로 모든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내가 오전에 출근을 한다(아내는 음악학원 원장). 오후 12시부터, 아내가 출근을 하고 나면 집에는 나 혼자이다. 아내가 운영하는 학원생들이 나를 간호한다고 학원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학원생 인원이 부쩍 줄었다고 한다.

꾸준히 학원 등을 돌봐야 하는데 나 때문에 그렇게 하지를 못하니 그럴 수 밖에 ~, 그런저런 생각을 하니 괜히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 때부터 내 마음대로 할 일을 한다. 집 밖을 나와 산책을 한다. 하루에 6,000보에서 10,000보 까지 천천히, 운동이 된다고 여길 때 까지 매일 도보로 걸었다.

때로는 오름을, 때로는 도심을, 해안 도로를 걷고 또 걸었다. 걷는 일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를 전혀 알 길이 없는 채로 걷고 또 걸었다. 시간이 날 때 마다 걸었다. 뇌경색 이후 몸이 뻐근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재활운동과 걷는 것을 병행함으로 이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매일 매일을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걷는 일을 했다. 내가 건강이 어느 정도 괜찮아 졌다고 여긴 후 대학에 전화를 해서 강의를 하기 위해 강단에 설 수 있도록 조치를 해 달라 부탁을 했다. 아직은 내가 대학에 재직 중인 교수 신분이었다.

병원에 입원한 이후 당분간 대학에 강의를 할 수 없다는 조치를 하였던 것이다. 몇 달이 지나 강의를 하는데, 내가 소속이 된 학과가 음악과이기 때문에 피아노 연주를 하면서 수업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때론 칠판에 음표를 적거나 기타 글을 쓰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그날 나의 경험을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아무런 생각 없이 피아노를 치려고 피아노 의자에 앉아 건반을 쳐 보니 전혀 엉뚱한 건반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프고 난 뒤 피아노를 처음 치는 것이다.

칠판에 백묵을 가지고 글을 쓰는데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뇌경색이 나의 소프트한 감성적인 부분을 살짝 건드리고 갔다는 실감을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나는 컴퓨터 작곡 버전을 사용하고 있는데, 작곡을 하니 무언가 그전하고는 다르게 전혀 컴퓨터 작동이 되질 않았다.

컴퓨터 작동 기술도 떠듬떠듬 느려도 여간 느린게 아니다. 내가 원하는 곡이 순탄하게 이루어지질 않아서 몇 차례 수정 작업을 하였다. 내가 생각하는 음악의 선율이 막상 컴퓨터로 제대로 전달이 되지를 않았다. 그래도 곡이 되지를 않았다. A4용지와 컴퓨터 잉크를 몇 차례를 갈아 사용할 만큼 열심히 작업을 했다.

왜냐하면 나에게 작곡은 생명이며 살아 있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작곡 없는 나의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수기(手技)가 아닌 컴퓨터 음악 버전을 사용해야만 했다. 이전에는 ‘앙코르’ 버전이었지만, 이제는 ‘피날레’ 버전을 사용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작곡전공을 한 청년을 집에 불러 새로운 컴퓨터 음악 버전 레슨을 받고 배우고 메모를 부탁을 했다.

이틀 동안 그 작업을 하여 남긴 노트를 열심히 읽고 실습을 하였다. 새로운 버전인 피날레를 능숙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매일을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작업을 했다. 그러면서 말을 할 때 나의 말투가 ‘ㄹ’이나 ‘ㄷ’ 받침 또는 ‘ㅎ’ 이나 겹받침의 단어를 얘기할 때는 대화가 되질 않았다.

그래서 시집의 무장을 일고 또 읽었다. 집에서 나 혼자뿐인 집에서 큰 소리로 낭송을 하였다. 반복하고 반복하였다. 매일 한 시간씩을 낭독을 하는데 시간을 할애했다. 이러한 행동은 의사나 타인에게서 들은 바가 없이 나 스스로 생각을 한 일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모 여인이 전화가 왔다. 생면부지인 그녀를 만나고 그녀가 하는 말, ‘내가 합창단을 조직을 하려 하는데 지휘를 맡아 주세요’라는 부탁의 말이었다. 그 분은 제주출신이 아니고 육지부 출신으로 제주에 이주해서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남편이 의사인데 풍토병 환자를 돌보는 의사로 제주도 해안마을에 정착을 하면서 일을 하고 있는데 부인은 원래가 사회봉사를 하고 있는 분으로 뜻한바 있어 합창단을 결성하려는데 지휘자를 물색하는데 아는 분이 나를 소개하여 만나게 된 것이라는 얘기었다.

나는 현재의 나의 건강 상태를 말하지 못하였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말을 하고 자리를 물러섰다. 고민이었다. 말도 못하고 행동도 순탄하지 못하는데 지휘자라니 두렵기도 하였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웅쿠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일을 하다가 보면 나의 건강에도 도움이 될것이다 라는 생각으로 허락을 하였다. 그 분은 지금도 그녀는 내가 뇌경색에 걸린 줄 전혀 모르고 있다. 합창단 이름은 ‘채송화 합창단’(후에 제주여성합창단으로 개명을 함), 북한에서 제주로 이주한 여성들이 모여 있는 여성 합창단이다. 일주일에 한번, 두 시간씩 합창단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합창을 하면서 몸을 움직이는 것이 몹시 불편하였지만 아무도 내가 뇌경색을 앓고 있는지를 모르기에 나는 전혀 의식을 하지 않고 음악용어를 말하면서 합창을 지도해 나갔다. 집에서는 그날 연습할 곡들을 연습을 해야 했다. 말도 불편하고 불편한 몸의 움직임을 운동을 한다는 생각으로 지휘를 했다. 그래도 단원들은 원래 내가 건강이 불편한 사람인가? 의심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는 중에 또 다른 합창단인 ‘제주부부합창단’ 총무가 전화를 해 왔다. 그 합창단은 창립 때 내가 지휘자로 활동을 했는데, 몇 년을 지휘활동을 하고 제자에게 합창단 지휘를 맡기고, 또 다른 합창단을 창립하기 위해서 부부합창단을 떠나 있었다.

그 사이에 합창단이 해체가 되고 몇 년간 합창활동을 하지 않고 쉬고 있었는가 보다. 그러나 단원끼리는 간혹 골프도 치고 식사를 하면서 모임을 가지고 있는 상태인데, 언제까지 이렇게 만나서 운동만 하지 말고 또 다시 합창단을 운영해 보자하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합창단 생활을 그리워하고 있었나 보다. ‘보고 싶다’는 말을 듣고, 찻집으로 향했다. 나도 오랜만에 만나는 얼굴들이다. 모두가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오랜만에 악수와 인사를 나누고 차를 마시는데, 총무가 ‘감독님(합창단에서 나의 호칭이 지휘자 겸 음악 감독이었다),또 다시 합창단을 운영하도록 해 주십시오. 감독님이 아니면 부부합창단 운영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때 까지만 해도 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입을 열어 말을 하면 뇌경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까 두려웠다.

사실 부부합창단 단원들의 연령층이 30대에서 50대 까지, 60대는 거의 없이 젊은 청춘들이었다. 그전 지휘자인 제자들이 이 청춘들을 지도하고 휘어잡기가 보통 힘이 들었던 모양이다.

총무의 이런 말을 듣고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이 자리에 모인 정도의 인원이면 합창을 할 수 있는 출발할 인원이 될 것 같아 ‘그럼 한번 해 보자’ 고개를 끄덕이면서 허락을 하고 그 자리에서 단장, 부단장, 여성부장, 총무, 파트 장들을 선임을 하고 부부합창단 제2기 창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날 나는 말을 삼갔다. 그저 웃기만 하고 말을 하지를 않았다. 나의 뇌경색 앓은 것은 전혀 밝히지 않은 채 그 다음 주부터 연습에 들어갔다. 그런데 단장 일을 맡으신 분은 이전부터 나를 잘 아는 사이인지라 어눌한 나의 행동을 알고는 합창 연습을 하다가 쉬는 시간에 나에게 조용하게 말을 걸어왔다.

‘감독님 말이 어눌합니다. 어디가 아프십니까?’ 나는 사실대로 말을 했고 지금 많이 호전되어 노력 중이라는 말을 했다. 단장도 이상하여 들어보는 말이다 라면서 ‘잘 알았다. 저도 유심히 살피겠다’ 고 하였다.

그렇게 부부합창단에서의 나의 행동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얘기가 없었다. 퍽 다행한 일이다. 단장은 간혹 연습 후에 나의 언어에 대하여 체크를 하곤 했다.

 

(연재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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