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칠 건강칼럼) 뇌경색을 이겨 내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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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칠 건강칼럼) 뇌경색을 이겨 내고..(1)
  • 강문칠(직곡가, 음악평론가)
  • 승인 2024.05.08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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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칠(직곡가, 음악평론가)


이 글은 직곡가, 음악평론가인 강문칠 전 예총회장 본인이 뇌경색을 앓은 후 수년간 투병한 과정과 완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내용을 총 정리한 글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 가운데 뇌경색을 안고 살아가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게재하게 된 것이다

 

 

 

건강을 되찾은 직후의 강문칠 작곡가
건강을 되찾은 직후의 강문칠 작곡가

 

2009년 12월 4일, 나는 대학 음악과 교수로 제주도예총회장을 3년째 수행하고 있었다(그 때의 나이는 59세였다). 그날은 마침 예총 이사회를 한 달에 한번 개최를 하고 있었는데, 그날이 매달 열리는 이사회가 있는 날이었다. 회의가 열리기 전 부터 몸에 이상 기운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겨 일을 정상적으로 처리를 하였다(이상 징후가 있을 때에 병원을 가야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회의 시작을 하고 30여분 만에 모임을 마쳤다. 그리고 언제나 처럼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모두가 회의장을 빠져 나왔다. 나도 그들과 같이 합류하기 위해 회의장을 빠져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좌석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몇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좌석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로 몸을 실었다. 1층으로 내려와 승용차가 있는 곳 까지 걸어갔다. 당시 나의 승용차는 싼타페였다. 다른 차에 비하여 내 차는 운전석의 자리가 조금 높다. 차에서 운전석으로 올라가려는데 무척 불편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운전석에 올랐다. 그리고 회원들이 있는 식당으로 출발을 했다. 아직 까지는 전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이지 큰일 날 뻔한 일이었다. 식당에 도착하여 차문을 열고 내려오려는데 도무지 차에서 내려올 수가 없는 것이다.

예총 직원이 이상한 나의 행동을 보고서는 먼저 도착한 회원분들에게 별도로 사정 얘기를 하고 집으로 모시겠다면서 나 대신 운전석에 앉는다. 나는 옆 좌석에 앉아서 집 까지 무사히 이동을 하였다.

집에 도착 하니 아내가 놀라면서 나를 부축을 한다. 안방으로 걸어가서는 침대에 몸을 눕혔다. 한참 후 아내가 깨워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미역국에 밥을 말아서 한 그릇을 뚝딱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는 또 다시 잠을 청했다.

잠은 잘 왔다(그 때만 해도 병원을 갔으면 아무런 일도 없이 무사히 지냈을 것을), 어찌 곤하게 잤는지 아내가 깨어서 일어난 시각은 다음 날 아침이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깊이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아내가 내가 깨어나자 병원으로 가자라면서 차를 몰았다.

아내는 평소에 다니는 한의원이 있는데, 제주시 서쪽 끝 한경면 조수리에 있는 한의원이다(원장 송태호). 한 시간여를 달려서(시골에 위치해 있어서 사람들이 잘 모르겠지만) 한의원에 도착했다. 그래도 아름아름 전해져서 그곳에는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시골의 한의원이지만 환자들이 많아 하루 종일 환자가 끝을 모를 만큼 들끓는 곳이다.

도착하여 순서를 기다리는데, 나는 평소에도 그곳을 자주 찾는 곳이어서 의사들이나 간호사들이 익숙하다. 순서가 되어 의사 앞에 앉았다. 맥을 짚은 의사는 놀라면서 바로 제주시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한다. 그 이외는 다른 일을 하지도 않았다.

한방 병원을 나와 급히 제주대학병원으로 갔다. 응급환자가 되어 응급실로 갔다. 의사의 소견을 기다리는데 바로 입원하라고 한다. 늦었다면서 병실을 지정해 주신다. 그제서야 내가 뇌경색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진은 특정내용과 관련 없습니다
사진은 특정내용과 관련 없습니다

 

●뇌경색은 뇌혈관이 막혀 뇌의 일부가 손상되는 질환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반신불수, 언어장애, 시야장애, 어지럼증, 의식소실 등의 증상이 있다고 한다.

뇌경색은 초기에 적절한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四肢마비, 치매 등의 지속적인 장애를 비롯하여 심지어 사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한다.

병원에 입원하자마자 나의 증상은 급속도로 빨리 악화가 되었다. 말을 못하게 되었고 혀가 굳는 것을 느꼈다. 걷는 걸음도 불편하여 걸을 수가 없었다. 조금씩 이동을 하며 병원 밖의 풍경을 바라보기도 하였다. 이제서야 내가 환자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전 까지도 나는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는 내가 1972년 11월에 군에 입대를 하여 훈련을 받고 있는 상황인데, 훈련을 받고 10분 휴식을 할 때 보면 대다수의 훈련병들이 흡연을 한다.

마음도 개운하지 않은데 기온마저 쌀쌀 하기도 하여 추위를 느끼는 계절인데, 나는 아직은 담배를 손에도 만져 보지 않고 있었는데 무심코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빨아 댕기다가 그만 기절을 하였다.

나는 훈련 중에 병실로 실려 갔고 이윽고 깨어나서 응급조치를 한 후에 훈련 장소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 때부터 나의 담배와의 흡연 기간이 시작이 되어 무려 40여년 동안 하루에 한갑을 꾸준히 피우고 있었다.

다시 병원으로 돌아와서, 한번은 병원 옥상에 나와서 아무도 안 보이는 곳에서 호주머니에 있는 담배를 만지작거리며 한 대 피워 볼까하고 꼼지락 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은 담배를 휴지통으로 버렸다. 그 때부터 담배와 이별을 하게 된다.

나와 담배와의 인연은 40여년 간 지속이 되었었다. 愛憎이 있는 담배, 그러나 전혀 후회나 괴로움이 없었다. 의사로 부터 담배를 끊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몸이 성치 않으니 조금이라도 나의 건강에 도울 수 있는 길을 선택하고 싶었다.

어느 날 내가 병실에 눕고 있는 바로 옆 자리에 내가 아는 분이 입원을 하였다. 한 때 고등학교 재직 시에 같은 학생과에 근무 하셨던 선배 교사가 뇌경색을 앓아 병실에 실려 온 것이다. 그런데 그는 나를 알아보지 않았다. 그는 나보다 더 심각한 환자였다. 그는 눈을 뜨지 않은 채 종일 누워만 있었다. 나하고는 몇 년간 안부 없이 지내 온 분이다.

그래도 아는 분이라 깨어나기를 바랐지만 며칠 입원 하고는 퇴원을 하였다. 내가 없는 사이에 그는 병원에서 나갔던 것이다. 더 이상 병원에서의 입원은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이후 그분의 안부를 듣지를 못했다.

 

●뇌경색은 주사를 놓질 않았다. 오직 약으로만 대체를 하는데, 나는 오전 오후로 재활장소를 찾았다. 병원이나 의사가 얘길 해 주질 않아 환자 스스로 재활 운동을 해야 했다. 내 나이 이제 막 60줄에 들어섰다.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기에 퇴임을 하고 편한 마음으로 하고자 하는 일이 있었다.

계획표는 없어도 마음 속에서 늘 세워둔 계획이 ‘제주어로 된 제주어 합창곡’을 발간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제주어를 전하고 제주어를 사용하는 제주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요즈음은 제주어를 사용을 하지 않아서 제주어가 말살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제주어를 살리려면 제주어 가사로 된 합창곡을 연주하게 하는 제주어 합창경연대회를 하여 전 도민들이 마을 마다 제주어를 사용하게 하고 합창연습을 하면서 제주어를 자연스럽게 사용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제주어가 살아나서 독특한 문화가 살아 움직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이 일을 하지 않고 세상을 마감한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지,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건강하게 일어나 걸어 다니거나 말을 할 수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오전 오후로 재활운동을 하고 시간이 날 때 마다 병원의 복도를 걸어 다녔다.

계단을 천천히 절뚝거리면서 한발 한발 짝 씩 천천히 걸으면서 수도 없이 사색도 하였다. 그러다가 10여일이 지나자 병원에서 일정한 기일이 지나면 퇴원을 해야 한다고 한다. 마침 나는 건입동 동문통에 위치한 덕용병원이 있는데 그 병원 이사장이 나하고는 고등학교 동창이어서 그곳으로 이동을 했다.

친구는 회복이 될 때 까지 그곳을 사용하라면서 의사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의사는 매일 하루에 한번 꼴로 나의 병실을 찾아와서 나의 상태를 물어보고 별일이 없는 것을 알고는 자리를 물러났다. 의사가 다녀가면 그 이후부터 나의 활동이 시작이 되었다.

근처에 있는 사라봉 꼭대기 까지 걸어갔다가 오는 일이다. 물론 몇 번씩 의자에 앉아서 휴식을 하기도 하였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넉넉하여 여유있게 걸었다.

그런데 잘 걷지도 못하여 지팡이에 의지하여 길을 걸었다. 겨울이라 밖은 쌀쌀하다. 방한모를 쓰고 마스크를 하고 안경을 쓰고 걸었다. 혹시 나를 알아보기라도 할까 두려워서 얼굴을 꽁꽁 애워 싸서 걸었다. 사라봉 꼭대기 까지 걸어가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연재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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